'징비록' 내용과 차이 주목…"단어 수정하고, 이순신 대의 부각"
"정치적 역학 관계 고심하며 '징비록' 수정·보완한 흔적 담겨"
![보물 '유성룡 종가 문적' 중 대통력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333.jpg)
![보물 '유성룡 종가 문적' 중 대통력 사진 [국가유산청 디지털 서비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370.jpg)
!['정유년 대통력' 별기 부분 표시한 부분은 '원씨 성을 가진 사람'(元姓人)을 적은 부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750.jpg)
![정유년 대통력 모습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자료, 류창해 소장 [노승석 위원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183_thum.jpg)
![충무공 이순신(왼쪽)과 서애 류성룡(오른쪽) 표준 영정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통문화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171.jpg)
![2022년 환수한 '경자년' 대통력 [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764.jpg)
![국보 '징비록'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28/yna1065624916269184_428_thum.jpg)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1597년 정유년, 조선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1592∼1598)의 상처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가운데, 강화 교섭이 불발되자 일본은 14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다시 조선 땅을 침략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전장에 없었다.
그해 왜적이 흘린 허위 정보에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고 신중하게 대응하자 선조(재위 1567∼1608)는 '왕명 거역'의 죄를 물어 그를 파직하고 감옥에 가둔다.
원균(1540∼1597)이 빈자리를 채웠으나 7월 칠천량(지금의 거제 하청면)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크게 패했고, 목숨마저 잃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에 올라 국정 전반을 책임지면서 오랜 친우인 이순신을 발탁했던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원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류성룡의 '일기' 속 원균은 그저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고전학자인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은 류성룡이 작성한 '정유년 대통력'(丁酉年 大統曆)의 별기 필사본 2면을 새롭게 번역한 내용을 28일 공개했다.
대통력은 오늘날 달력에 해당하는 책력(冊曆·월일과 절기 등을 적은 책)이다.
책자 형태로 돼 있어 날짜 옆에 일정이나 개인적인 생각 등을 메모처럼 적기도 했는데 일종의 다이어리, 혹은 일기로 쓰인 셈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유성룡 종가 문적'에는 갑오년인 1594년과 1596년(병신년), 1597년(정유년), 1604년(갑진년), 1606년(병오년) 대통력 5권이 포함돼 있다.
노 위원장은 정유년 대통력 본문에 덧붙여 따로 적은 기록(별기) 약 520자를 새로 번역해 교감(校勘)했다. 교감은 원문에 잘못 적은 글자를 바로잡거나 음이 같은 글자를 통용해 쓴 부분을 원래 뜻과 문맥에 맞게 바로잡는 작업을 일컫는다.
노 위원장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별기 기록을 분석한 결과, 류성룡의 대표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의 인물 표기, 발언 등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징비록'의 초고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자료"라고 의미를 부연했다.
대표적인 부분이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상황을 언급한 내용이다.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도수사(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그가 거느린 수군이 수만 명이고 전선도 매우 많았으나, 감히 교전하지 못하였다."
'원씨 성을 가진'(元姓人) 사람은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을 비롯한 류성룡의 다른 저작에서 실명을 쓴 것과는 차이가 있다.
노 위원장은 "정유재란 당시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좁아진 류성룡이 타인의 눈에 띄어 모함이나 화를 입을까 염려해 고의로 실명을 숨긴 흔적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별기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응표(1555∼1611)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충무공 휘하에 있었던 이응표는 이후 명량해전에서 공을 세우기도 한다.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한 부분도 남아있다.
별기에는 1592년 원균이 왜군에 밀려 후퇴하는 상황과 관련해 '남해 항구에서 떠돌아다니며 장차 육지로 내려가 도주하려고 했다"고 적혀 있다.
노 위원장은 "'징비록'에는 '곤양해구에서 적을 피하려 했다'는 문구로 기록돼 있다"며 "훗날 교정을 거쳐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한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노 위원장은 이순신을 위해 '삭제'한 기록도 눈여겨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1592년 원균은 이영남을 보내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군사를 요청했는데 이순신은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력에서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순신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각각 나누어 지키는 구역이 있으니 만일 적이 또 이 경계를 침범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대처해야 할 것이요….'"
노 위원장은 "훗날 감정적 구역 다툼으로 오해받을 소지를 없애고 이순신의 대의를 부각하기 위해 '징비록'에서는 해당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노 위원장은 "이번 별기 기록은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고심하며 '징비록'을 수정·보완한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자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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