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유골봉환 협의서 日측 관계자들과 치열한 협상전 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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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하시마(군함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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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나가사키 조선소 [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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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유텐지에서 열린 유골봉환 추도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
[日강제동원위 11년사] ②2015년 군함도 때는 이렇게 대응했다
메이지 산업유산 등재심사 막전막후서 역사적 사실자료 제공
희생자 유골봉환 협의서 日측 관계자들과 치열한 협상전 벌여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일제 강제동원 문제 전담기구였던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에만 그치지 않고 한일 역사문제에 대한 현실 외교에서도 숨은 역할을 했다.
2015년 한일관계의 최대 화두 중 하나였던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 산업혁명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위원회가 한국 외교당국에 제공한 자료는 결국 일본 측이 '강제노역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국제사회에 공식 인정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 정부가 자국에 안치된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골을 정중한 태도로 한국에 돌려보내는 과정에서도 치열한 협상전을 통해 일본 측 관계자들을 설득한 위원회의 노력이 있었다.
◇ '메이지 산업유산' 외교전은 '팩트'에 근거한 설득 주효
2015년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 ICOMOS)는 메이지 산업유산에 대해 '등재'를 권고했다. 이코모스가 등재를 권고한 이상 탈락 가능성은 희박했다. 세계유산위원회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개월이었다.
다만 이코모스는 일본 측에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알 수 있도록 할 것을 함께 권고했다. 여기에는 이코모스 회의를 앞두고 강제동원위원회 측의 조력을 받아 한국 정부가 위원들을 상대로 벌인 여론전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메이지 산업유산이라는 명목으로 등재 시기를 1850~1910년으로 설정해 1940년대 강제동원 논란을 피해가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메이지 산업유산 대응에 참여한 정혜경 박사(당시 강제동원위원회 조사과장)는 이코모스 설득 전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일전 모양새로 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연합군과 중국군 포로도 다수 노역했다는 '보편성'을 강조하는 쪽이 국제사회 설득에 효율적이라는 취지였다.
정부는 이런 의견을 반영하고, 위원회가 보유한 자료들을 넘겨받아 등재 후보지의 전체적 참상을 보여주는 자료를 제작했다. 이 자료는 이코모스 위원들에게 제공됐고, 결과적으로 이코모스는 등재를 권고하면서도 일본 측에 사실상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라'는 취지의 무거운 책임을 지웠다.
위원회 활동 당시에는 자체 구축한 내부 데이터베이스(DB)를 활용할 수 있어 필요한 자료를 뽑아내는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위원회가 '팩트'를 정리해 보내면 외교당국자가 이를 검토한 뒤 세계유산위원회 입장에서 질문하고, 그에 따라 다시 내용을 보완하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대응 근거와 논리를 완성해가는 작업이 이어졌다.
청와대에서도 위원회에 관련 내용 설명을 요구했다. 위원회는 이미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등 등재 대상지에 대한 2건의 조사보고서를 포함해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보고 위원회 브리핑을 받은 청와대 관계자는 "이렇게 자료가 다 있는 줄 몰랐다"며 반색했다고 한다.
마침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방한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만나는 일정이 잡혔다. 위원회 보고 내용을 사전에 전달받은 박 대통령은 보코바 사무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등재 신청이 "국가 간 불필요한 분열만 초래한다"며 강한 어조로 일본을 비판했다.
위원회의 이같은 조력은 '전체 역사 반영'을 끌어낸다는 한국 정부의 외교전략에 탑재돼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계속된 한일 양국 간 협상에서도 활용됐다. 결국 그해 7월 세계유산위에서 일본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노역'이라는 표현을 언급하게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 日 관리들과 테이블 마주앉아…유골봉환 협상전
위원회는 일본 정부 측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외교적 성과를 끌어내기도 했다. 일본 도쿄의 사찰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된 군인·군무원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을 2008년부터 2010년까지 4차례 봉환하기에 앞서 조건과 절차를 놓고 일본 측과 치열한 협상전을 벌인 것도 위원회 관계자들이었다.
당시 위원회 유해팀장이었던 오일환 박사는 2007년 유골 봉환 실무협의 당시 회의 장소를 기존의 외교부가 아닌 위원회로 잡았다. 일본 측 관계자들에게 위원회의 업무 과정과 자체 구축한 전산시스템을 보여줘 '우리는 실증적 근거를 갖고 일하니 허투루 보지 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일본 관리들이 도착하자 회의에 앞서 위원회가 구축한 전산시스템이 시연됐다. 과거 일제가 작성한 강제동원 관련 명부들이 전산화돼 이름만 입력하면 모니터에 원문 자료가 떠올랐다. 위원회 측은 이어 일본 관계자들을 기록실로 데려가 사람 키만큼 쌓인 피해조사 자료들을 보여주고, 이런 자료와 시스템이 피해조사와 판정에 어떻게 활용되는지 브리핑까지 했다.
당시 위원회의 목표는 단순히 일본에서 유골을 돌려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현지에 동행할 유족들에게 일본 정부가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각종 편의를 제공하며, 고위급 인사가 추도식에 참석해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사죄 입장을 추도사로 언급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돼 있었다.
일본 측은 초반에는 미온적 태도로 나왔다. 그러자 위원회 측은 "오늘도 이 건물에 유족들이 와 계시는데 그분들께 합의가 안 됐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나"라고 대응했다. 안색이 바뀐 일본 관리들은 정회를 요청하더니 핵심 관계자들만 모인 자리에서 속내를 털어놨다.
일본 측 입장은 행여 유족들이 현지 행사에서 소란을 피워 자신들의 체면을 구길 가능성이 있으니 한국 정부가 확답을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위원회 측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는 약속을 구두와 문서로 남겼고, 그제야 일본 측은 봉환 절차와 내용에 합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8년 1월 1차 유골 봉환이 이뤄졌다. 당시 현지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일본 외무성 부대신이 참석해 "한국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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