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쓴 속마음…'내방가사'로 보는 옛 여성들의 희로애락

박상현 / 2021-12-26 15: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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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 특별전 '이내말삼 드러보소'…첫공개 12점 등 260점 전시
지극한 효심부터 신세 한탄까지…"여성의 모든 면 기록"
▲ 내방가사 '헌수가'의 일부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국립한글박물관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 특별전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내방가사 '쌍벽가'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내방가사 '계녀통론'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국립한글박물관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 특별전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글로 쓴 속마음…'내방가사'로 보는 옛 여성들의 희로애락

국립한글박물관 특별전 '이내말삼 드러보소'…첫공개 12점 등 260점 전시

지극한 효심부터 신세 한탄까지…"여성의 모든 면 기록"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인자하신 우리부모 영영행복 하옵소서/ 이같이 좋은모습 만고불변 하옵소서/ 자녀혼인 마치신후 명승지를 누비실때/ 무주무풍(茂朱茂豊) 행차하여 불초한딸 찾으소서"

일제강점기 여성이 부모의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며 14m 길이 두루마리에 한글로 쓴 '헌수가'(獻壽歌)의 일부다. 헌수가는 '회갑을 축하하며 술잔을 올리는 노래'를 뜻한다. 작품에 나오는 방언을 보면 경상북도에서 향유된 가사로 짐작된다.

헌수가는 여성들이 지은 가사인 '내방가사'(內房歌辭)다. '가사'(歌辭)라고 하면 정철의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이 유명하나, 여성들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내방가사는 일반 가사와 동일하게 형식상 4음보(音步·시에서 운율을 이루는 단위)를 이루지만, 한글로만 적고 여성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점이 특징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내방가사 90여 편을 포함해 자료 172건 260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를 한국국학진흥원과 함께 내년 4월 10일까지 연다. 출품 자료 중에는 헌수가와 '계녀통론'(誡女通論)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작품 12점이 포함됐다.

지난 24일 전시실에서 만난 서주연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내방은 여성의 생활 공간을 의미한다"며 "내방가사는 4음보 외에 형식적 규칙이 없어 한글을 아는 여성이라면 쉽게 창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방가사에 대해 "남성이 지은 가사와 달리 대부분은 작자를 알 수 없다"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도 전승되고 있는데, 특히 영남 지방에서 작품이 많이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서 연구사는 내방가사가 "여성들의 소통 창구였다"고 강조했다. 옛 여성들은 내방가사를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지참하고, 필사해서 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눈길을 잡아끄는 화려한 유물로 꾸미지 않았지만, 가사 문구를 읽다 보면 절절한 효심부터 노처녀나 과부의 신세 한탄까지 옛 여성들의 속마음과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서 연구사는 "내방가사에는 여성의 모든 면이 기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시장 첫머리에는 연안이씨가 1794년 완성한 '쌍벽가'라는 작품이 있다. 현존 최장 내방가사인 헌수가의 절반에 달하는 길이 7.2m 종이에 아들과 조카가 과거에 급제해 느낀 희열을 표현하고 자신의 공헌을 은근히 나타냈다.

서 연구사는 "연안이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안동 풍산류씨 가문과 혼인했다"며 "당시 풍산류씨 집안은 오랫동안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던 터라 매우 기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방가사는 여성이 주로 작성하고 읽었지만, 간혹 남성이 짓기도 했다. 예컨대 자녀를 시집보낼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나 없다면 남성이 써서 딸에게 건넸다. 이러한 내방가사는 대개 예의범절을 훈계하는 '계녀가'(誡女歌)에 속한다.

1892년 작품인 계녀통론에서 작자는 "지여주자 지여주자 계녀가를 지여주자/ 계녀라 하는말은 딸가르친 말씀이라/ 예절없고 어린것을 남의가문 보내놓고/ 시집살이 하는딸의 아비되고 잊을쏘냐"고 했다.

헌수가나 쌍벽가, 계녀통론이 유교 관념과 전통적 가치관이 담긴 내방가사라면, 다소 해학적이고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낸 작품도 있다.

조선 후기 노처녀가 남긴 한 내방가사에는 "우리부모 생각이 전혀 없네/ 양반인 체하면서 도리를 따르지않네/ 괴이한일 일삼으니 나만계속 늙어간다/ (중략) 독수공방 긴긴밤에 혼자탄식 잠못드니"라는 내용이 있다.

또 '과부전'이라는 작품에는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설움 들어보소/ 불상하고 분한몸이 여자밖에 또있난가"라는 슬픔이 짙게 밴 대목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녀평등과 학교 교육을 주장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여성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내방가사를 짓기도 했다.

내방가사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소개한 전시는 마지막 공간에서 여성들의 연대와 소통을 강조한 '덴동어미화전가'와 생존 작가인 최희가 2015년에 쓴 '아오모리온천 여행기' 등을 선보인다. 대형 스크린에는 꽃놀이에 나선 여성들을 다룬 덴동어미화전가를 재해석한 영상이 흐른다.

서 연구사는 "여성들이 풀어낸 인생 이야기에는 언제나 가족이 중심에 있었다"며 "온통 빠른 것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전시를 통해 잠시나마 4음보의 운율이 주는 편안함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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